가장 가까운 가족이,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슬프지 않고 오히려 놀랍도록 아무렇지가 않습니다. 혼자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슬피 우는 표정을 연습도 해보지만 도대체 눈물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전처럼 회사 출근도 똑같이 하고 일상이 아무런 변화 없이 돌아갑니다. 단지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투자 분석가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의 이야기, 영화 데몰리션 Demolition 은 그렇게 시작이 됩니다. 데몰리션 Demolition은 무너뜨리다, 파괴하다, 철거하다를 의미합니다. 아내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의 터전을 밑바닥부터 철저히 다 부숴버리는 데이비스.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의 감정의 변화와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의 힘겨운 과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고치려면 전부 뜯어내버린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해
슬프게도… 그녀가 죽었는데 괴롭거나 속상하지도 않아요.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무척 충격이 컸던 영화였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눈앞에서 아내를 잃은 한 남자의 행동들이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데이비스의 입장에서 보니 그의 감정이 보였습니다. 왜 무심했는지, 무엇이 새롭게 보이는지, 화면 사이사이 드러나는 아내 줄리아(헤더 린드)의 모습 조각들이 데이비스의 행복을, 혹은 불행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를 잃고도 다음날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하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수군거리고 측은해 하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지냅니다. 아내가 죽은 날 망가진 병원 자판기에서 돈을 잃은 데이비스는 항의 편지를 쓰며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고객센터 직원 캐런(나오미 왓츠)과 통화를 합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자신도 몰랐던 감정을 하나씩 끄집어냅니다. 캐런과 그의 아들 크리스(유다 르위스)를 만나며 출근도 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여기저기를 헤매던 중 철거 현장을 찾습니다.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살아가던 데이비스는 생활의 모든 것들을 하나씩 분해하고 해체하기 시작합니다. 컴퓨터를 분해하고, 회사 화장실 문을 해체하고 급기야 크리스와 함께 자신의 결혼생활 자체를 해체합니다. 아내와의 추억으로 가득한 자신의 집까지, 결혼 생활 전부를 조각조각 분해하는 장면은 데이비스의 불안의 크기만큼 파괴의 속도감에서 그의 후련함이 느껴집니다.
저와 줄리아는 사랑했어요, 제가 그 사랑에 무심했을 뿐
사람이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충격을 겪게 되면 오히려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나중이 되어서야 새록새록 충격이 다시 떠오르며 감정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데이비스가 맞이한 아내의 죽음이 그러했을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내를 잃은 상실감과 그와는 별개로 그가 살아가는 일상의 부조화 속에서 자신을 버티는 방법이 '결혼을 해체'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심하게 지냈던 아내와의 결혼 생활 하나하나를 다시 온전히 느끼며 자신이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었고 또 얼마나 쉽게 덤덤했었던지 알아 가는 제이크의 감정 연기가 인상적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모든 감정을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적당한 분노와 기쁨과 슬픔, 무감각을 안고 삽니다. 현실을 살면서 얼마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세세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의 감정을 잘 돌보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충격과 슬픔이 꼭 눈물이 아니어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그것은 그 나름의 표현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볼 상실감에 복잡 미묘한 감정을 하나씩 깨닫고 데이비스처럼 더 크게 눈물 흘리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공허하고 무표정하던 데이비스가 헤드셋으로 음악을 들으며 춤추던 장면과 크리스와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어른스러운 장면, 마지막에 아이들과 시원하게 달리던 장면은 그의 감정이 감각을 통해 어떻게 얼마나 자유로워지는지 보여줍니다. 마지막 엔딩 Half Moon Run의 Warmest Regards는 데이비스가 느끼는 쓸쓸함과 외로움이 함께 느껴져 여운이 남습니다. 조금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고 그 마음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영상과 음악의 조화를 직접 영화로 보고 느껴봐야 이해가 되는 영화입니다. 소중한 것을 상실한 후에야 익숙하다는 이유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무뎌지고 무신경한 일상을 사는 우리 스스로에게 해체 후의 우리는 어떨지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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