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고 나른한 여름날 오후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무심히 바라보는 시간이 좋고, 나뭇잎이 오후 햇살을 받아 아른거리는 그림자를 바라보는 시간도 좋습니다. 아무리 바쁜 하루를 보내더라도 꼭 눈을 돌려 하늘과 바람과 자연을 바라보려 합니다. 시선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 편의 조급증과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고르게 정렬되는 것 같습니다. '세월아 네월아' , '굼벵이', '늘보'... 이런 사람이 빠른 세상에 적응하며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급하지 않은 성격에 급하고 빠른 세상을 살아가자니 버겁습니다. 나만의 문제일까 싶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 건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각자 자신만의 길을 걷다 보면 쉴 곳이 필요합니다. 바라볼 시간도 필요하고 생각할 시간도 필요합니다. 마음속 숨구멍을 키우고 싶은 시간, 그 공간 안에서의 자유로움을 꿈꾸며 잠시 생각에 잠겨 봅니다.
달팽이는 달팽이처럼, 개미는 개미처럼
서울에서 보기 드문 흙길을 걷다 발견하는 개미의 행렬이나 어쩌다 물컵 속에 얻어걸린 달팽이를 가만히 지켜봅니다.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온 개미는 끝이 없을 것 같은 긴 행렬을 이루며 다른 흙더미를 향해 바쁘게 나아갑니다. 반면 달팽이는 보는 사람이 지루할 만큼 - 아니 실제로는 투명 컵 밖으로 나오려는 달팽이의 느릿한 움직임이 신기해 한 없이 바라보게 됩니다. - 느리게 느리게를 반복해 움직이며 오랜 시간을 애씁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개미와 달팽이의 삶의 속도는 그렇게 다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이 개미를 바라보는 시선은 덩달아 바빠지고 달팽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덩달아 느려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바라보는 시선의 속도도 달라집니다.
태어나기를 늘보처럼 굼뜨게 생겨 먹어 느림보의 속도로 살아갑니다. 제 삶의 속도입니다. 가끔은 괜찮은가 싶기도 하지만 달팽이가 개미처럼 달릴 수는 없습니다. 개미는 개미의 생김대로, 달팽이는 달팽이 생김대로 살아야 맞습니다. 개미의 기준으로 달팽이를 나무랄 필요도 없고, 달팽이가 억지로 개미를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사회에서는 가끔 생긴 대로 사느라 곤욕을 치르거나 낭패를 당하기도 합니다. 손해를 보는 경우도 간혹 발생합니다. 하지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불편함처럼 살기보다는 나의 속도로 사는 것을 선호합니다. 살랑이는 바람 속에 편한대로 누워 시시각각 모양이 변해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행복한 시간을 갖습니다.
돌고 돌아 도착하는 결승점
어릴 때 처음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던 날이 기억납니다. 전교생과 학부모들이 모두 모여 서로를 응원하며 실력을 다투던 행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초등학교 운동회란 무척 특별한 기억을 갖게 합니다. 한 번씩 그 큰 운동장을 뛰어야 하는 시간, 그렇게 커다란 운동장에서 달려본 적이 없어서 처음부터 운동장에 그려진 제일 큰 선을 따라 밖으로 끝까지 달리다 꼴찌를 했습니다. 이미 먼저 들어온 아이들은 손등에 등수대로 도장을 받고 상품을 나눠 갖느라 분주했습니다. 뿌연 먼지 속에 결승선이 거의 지워진 곳에 혼자 들어왔을 때 아무도 꼴찌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착한 자식을 칭찬하는 부모님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들은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왜 끝까지 선을 지키고 들어왔는지 물어보시고, 내가 가장 큰 원을 다 돌았다는 것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도착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정말 잘했다고 말입니다. 1등은 아니었고 꼴찌였지만 어린 마음에도 뭔가 '큰 일'을 해낸 것처럼 기분이 우쭐해지는 칭찬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것은 '나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한 영특함을 갖고 가장 짧은 선으로 달려 들어왔었다면 운이 좋아 1등도 되고 상품도 좋은 걸 받았을 테지만, 내가 달려간 원의 커다란 선이 당시 내가 알고 있는 '내 선'이었고 그 선을 지켜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같은 결승점'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직선을 좋아합니다. 빠르게 곧장 성과를 얻고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오랜 길을 걸어갈 때 구불구불한 길이 곧게 뻗은 아스팔트 길을 걷는 것보다 덜 힘들 때가 있습니다. 운이 좋아 곧은 길로 들어설 때도 있고, 때로 형편없이 굴곡진 길을 걷기도 합니다. 구불구불 쉬어가는 마디마디의 곡절 있는 길 위에서 우린 뜻밖의 휴식을 갖기도 하고 덕분에 눈을 들어 두루 살필 기회도 갖습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스스로 찾아들 숨구멍을 하나 만들어 두면 내 안에 자라는 내가 '특별한 나'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잠시 짧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2022.06.21 - [짧은 생각] 은행이 사라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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