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고령자들이 꽤 많습니다. 특히 버스를 타고 서울 외곽으로 이동하는 경우, 승객들 대부분이 노인들입니다. 얼마 전 버스를 타고 가던 중 한 할머니가 조용히 가시님 자리로 이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곤 아무 말을 하지 못한 채 서성거립니다. 위험하다며 앉으라는 기사님의 말을 따르면서도 자꾸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할머니, 그렇게 몇 정거장을 지나갑니다. 기사님은 신경이 쓰이는지 백미러를 보시면서 묻습니다.
"할머니, 어디 내리세요?"
"......"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무슨 아파트라고?
우리나라는 산업이 발달하면서 도시가 성장하고 밀집된 인구밀도와 불량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경제적 성장의 상징처럼 아파트를 짓기 시작합니다. 수세식 화장실과 입식 생활로의 전환점을 지향했던 아파트가 이젠 흔한 우리 생활 터전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국가의 정책적인 측면이 고려되었으나 차츰 고층, 초고층의 아파트가 지어지고 신도시나 재개발 사업이 활성화되면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처음 아파트 이름은 기껏해야 지역이름에 건설사 이름을 딴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심플했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모두가 알만한 건설 회사들이었으니까요. 신도시가 생기고 나서 공동체의 이미지를 갖추기 위해 '~마을'이란 이름을 추가해서 불렀습니다. 아파트 단지이지만 아기자기한 이미지를 갖는 마을이란 이름이 친근감을 갖도록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재건축이 활발해지면서 영어가 섞이거나 추가되었습니다. 아파트가 부동산 정책에 따라 자산 가치로 인식이 되면서 아파트 이름에 따른 인지도가 아파트값 상승이라는 '믿음'은 굳건한 신뢰가 되기 시작합니다. 건설사명 외에 나름 주거생활의 향상을 지향하는 브랜드 전략이 추가됩니다. 현대 아파트가 현대 아이파크가 된 것처럼 대림 아파트가 이편한 세상이 된 것처럼.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고 이젠 아파트 이름이 부르기 힘들 만큼 심하게 길어졌고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아파트에 사는지 알지 못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현재 가장 긴 이름으로 알려진 아파트는 심지어 25자(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빛가람대방엘리움로열카운티 1차- 사실 이 이름은 ‘대방’ 건설이 ‘광주 전남 공동혁신도시의 빛가람’ 마을에 지은 아파트라는 의미일 뿐이지만 꼭 그렇게 길게 불렀어야 했는지는 글쎄요...)라고 합니다.
너무 길고 복잡해서 부르질 못해
시골에서 사시는 부모님들이 가끔 자식들의 집에 들르지만 자신의 자식들이 사는 아파트 이름을 모릅니다. 자신의 집이 아파트인 경우에도 역시 자신이 무슨 아파트에 사는지 잘 모릅니다. 아파트 이름이 너무 길어서, 너무 어려워서 부를 수가 없습니다. (오래된 개그 중에 귀한 독자가 오래 살길 바란다며 긴 이름으로 작명한다고 했던,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름처럼) 그냥 4단지이거나 현대이거나 포스코거나, 은하수 마을이거나, 수정단지이어야 할 텐데, ~포레, ~컨소시엄, ~파크뷰, 복잡하고 게다가 길기까지 하니 알아들을 수도 부를 수도 없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아파트 이름은 어느 순간부터 모두 영어 발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간혹 한국어라 하더라도 꼭 몇 가지 영어 단어가 조합되어 복잡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간해선 젊은 사람들도 부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어렵고 길어지는 걸까요? 이름이 복잡할수록 고가 아파트로 인식을 하기 때문인가요? 부동산 가치가 올라 재산 증식에 도움이 되나요? 가뜩이나 점점 멀어지는 부모 자식 간 거리, 그 가운데 긴 아파트명이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가요?
할머니는 기사님의 질문을 듣고도, 집에를 가야 하는데 자신이 내려야 하는 버스 정류장 이름이나 아파트 이름을 대지 못합니다. 버스 기사님이 이런저런 지역 정보를 반복해서 물어보지만 할머니는 답하지 못한 채 쩔쩔맵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혼자 어떻게 외출을 하시는 거지? 의문이 듭니다. 결국 여러 질문 끝에 할머니는 거리에 내려섰지만 멈춰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불안한 눈빛은 한동안 기억에서 계속 지워지지 않습니다. 버스 기사님의 세심한 질문들을 들으며 새삼 사려 깊은 마음에 안심이 됩니다. 분명 할머니는 잘 들어가셨겠지요?
외래어나 외국어가 섞여야 집값이 오른다고 착각(현실인지도 모르지만)하는 비루한 인식이 만들어낸 결과가 지금의 아파트 이름들입니다. 어쩌면 아파트 이름에 약칭이 등장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긴 이름의 아파트명을 가진 입주민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어떻게 부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형상이 사실 좀 우습고도 슬프지 않나요?
2024.10.16-[짧은 생각] "아무거나 괜찮아"... 는 이제 그만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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