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전보로 서로 소식을 전하다가 전화를 처음 사용하던 시기, 수동 카메라로 직접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을 수 있었던 시기, 삐삐와 그 이후 지금 기준으로 엄청나게 커다란 휴대폰을 사용하기 시작하던 시기, 문을 여닫던 흑백 TV가 사라지고 컬러풀한 색상을 자랑하며 점점 얇은 TV가 나오던 시기, 뚱뚱한 컴퓨터가 사라지고 얇은 노트북과 태블릿을 사용하게 된 시기, LP판이 사라지고 CD플레이어가 등장하던 시기, 워크맨이 사라지고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게 된 시기... 아주 오래전 있었던 일들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성장기와 함께 모두 빠르게 경험했던 것들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빠른 성장이 만들어낸 모습들입니다.
사람 냄새나는 물건들이 이야기를 만든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날로그적인 것들이 더 많은 기억을 자극하고 더 많은 사람 냄새나는 느낌을 담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음악을 들을 때 LP판을 듣는 느낌과 CD플레이어를 통한 디지털 음으로 들을 때의 느낌은 많이 다릅니다. 디지털 음은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이 소리가 선명합니다. 소리 그 자체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은 최고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음악이 주는 감흥이 LP판의 풍성함을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LP판으로 듣는 음악은 잡음이 섞여 음질이 떨어진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음악 자체의 울림을 전해 줍니다. 같은 음악이라도 어느 방식으로 듣느냐에 따라 속도와 느낌 자체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날로그 사진기로, 필름을 넣어 사람이 조리개를 조작하고 렌즈를 일일이 맞추며 인간의 느낌을 최대한 담아내려 애썼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디지털로 찍는 사진과의 느낌은 많이 다릅니다. 선명성이나 색감은 아날로그가 따라갈 수 없지만 풍부한 감성은 디지털과 다릅니다. 아이들에게 카메라 조작법을 하나하나 알려주고 카메라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 주던 시절에서, 휴대폰만 사주면 모두 알아서 조작하고 큰 노력이나 횟수 제한 없이 무한 복사가 가능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빠르고 단순하게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서로 공통점을 갖고 교류하거나 함께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각자의 시간 속에서 각자의 기계를 조작하고 남들처럼 SNS로 정보가 공유될 뿐입니다. 사진 하나를 놓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던 시간도, 함께한 사건도 사라지고 추억의 길이도 그만큼 짧아졌습니다.
세상이 편리해질수록 사람들의 몸은 훨씬 덜 힘들어지고 시간도 훨씬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맞추느라 실제로 사람들 마음은 여유롭지 못합니다. 생활의 편리함이 오히려 사람들의 생활을 그전보다 훨씬 더 바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들면...
사람이 직접 손으로 하던 많은 것들이 간단히 버튼 하나를 조작하거나 단순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해결되고 있습니다. 손으로, 몸으로, 사람이 직접 해야 할 것들이 줄어들면 인간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문득 궁금해지는 시점입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 뇌를 연구해서 새로운 사이보그를 만들었지만 그 사이보그에게 인간이 지배당하는 순간, 인류의 진화를 당연한 것으로 알았지만 진화 이후의 인류의 멸망이 앞당겨지는 - 그런 시대가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007 시리즈의 신기한 물건들을 재미있게 바라보다가, 혹성 탈출에서 인간이 지배당하는 장면에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점점 영화에서나 볼법한 장면들이 하나씩 현실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편리해질수록 사람이 몸으로 직접 할 수 있는 일들이 꽤나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디지털 세상의 새로운 분야가 생기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창의성 확장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자유로운 상상력과 사람들 간의 관계가 퇴화되는 것은 아닌지? 굳이 따지자면, 거꾸로 가는 진화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들이 세상에 흔해지면서 그간의 노력과 고통, 그리고 그 결과의 기쁨들이 희석되는 세상이 되고 있지만, 무형의 가치로써 사람들의 마음과 감정과 관계들은 그래도 함께할 수 있는 세상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2023.01.10 - [짧은 생각] 남들보다 한 박자 늦게 살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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