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잡多]

[짧은 생각] <지식인을 위한 변명> 도 '변명'할 수 없는,

나두매일 2025. 7. 1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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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知識人
* 일정한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 또는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

 
 
무엇을 배웠다고 해서, 숱한 지식을 쌓았다고 해서 그들이 무엇을 하리라는 기대는 정당한가요? 지식을 쌓은 것이 세상살이에 주는 도움보다 그 당사자의 삶에 더 큰 효용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요?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인에 대한 허상, 그들은 생각보다 무력합니다, 무력한 존재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들에 대한 기대와 효용이 그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지도 못하고 그들의 개인 이익에 보상을 줄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지식인은 늘 존재해 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전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대학생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뭔가 많은 공부를 할 것 같고, 사회의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며 세상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 것 같고, 가방끈이 긴 만큼 아는 것도 많은 지식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고 인식되었던 때였습니다. 한국인의 교육열은 여전히 특별했고 성공의 지름길로 인식되는 바탕을 갖고 있어서 많이 배운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이유도 없이 한결같이 우호적이고 선뜻 도움 주기를 망설이지 않았었습니다. 쉽게 말해, 가방 끈이 긴 사람들이 살기 편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식인에 대한 오해와 기대

 
어느 순간 학제 개편과 교육과정, 대학입시 제도의 변화를 겪으며 사회에 대학생들이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습니다. 한 동네에 어쩌다 한 두 명이던 대학생이 여기저기(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길거리에서 발에 걸리적거리는 젊은 사람이 모두 대학생이었다고) 많아졌습니다. 대학생들이 많은 만큼 그 결과로 세상은 더 좋아질 거라고 가대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방끈이 긴 것은 지식이 아닌 암기력 좋은 아이들이 대학생의 옷(학생신분)을 입은 것에 불과하고, 그렇게 들어온 대학은 직업 훈련을 하는 곳으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사회적, 인문적, 철학적 교양을 배우며 함께 살아갈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함께할 이유는 사라졌습니다.(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가 전쟁을 치르고 난 후 진짜 지식인들이 존재했었는지는, 글쎄요.) 바쁘고 위험한 세상일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에만 급급합니다. 졸업하고 돈 잘 벌고 남들이 인정하는 곳에 취업하는 것이 제일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사회적 인식은 전혀 다른 기대와 오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지식인은 영원히 자기비판을 할 수밖에 없고, 이들이 택할 수 있는 객관적 관점은 소외되고 억압된 피지배 계급의 측면에서 보는 관점이어야 한다고 사르트르는 말합니다.
 
"지식인은 끊임없이 자기의 사고를 반성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가 사는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가장 혜택 받지 못한 계층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면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 지식인은 없습니다. 학력(혹은 학벌)이 좋은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지식인은 죽고 사라졌다는 의미가 맞지 않을까요?
 
 
19세기,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이 발생했습니다. 한 보병 대위의 간첩조작 사건으로, 진범을 잡고도 풀어준 채 무리하게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사건을 은폐 조작했다가 에밀 졸라의 고발 글이 계기가 되어 드레퓌스 파(재심파)와 반드레퓌스 파(재심반대파) 간 격돌이 발생합니다. 결국 재심을 통해 대위의 무고가 밝혀지고 사건이 종결되었지만,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시오니즘 운동의 본격적인 시작 지점이 됩니다. (당시 유대계 언론이었던 데오도르 헤르츨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한 후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함으로써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시발점이 됨-위키백과) 에밀졸라의 행동은 지식인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만들었고 이로써 지식인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층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에밀 졸라의 예에서 보듯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지적 능력과 관계되는 일을 통해 얻은 명성을 <남용해> 자기들의 영역 이외의 새로운 개념으로 사회와 기존 권력을 비판하려 드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의미하게 됩니다. 지금은 그 범위가 확장된 측면이 있지만 - 인플루언서가 혹은 유명 연예인이, 아니면 장사에 재주가 있는 사업가가 그런 역할을 기대받고 있습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거는 기대, 뭔가 사회에서 영향력이 생긴 탓에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분야까지 자기 안목의 개념을 적용하면서 사회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려는 성향을 보입니다. 책임의 문제로만 보면, 과연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대중의 기대와 개인의 영향력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내는 권력의 틀 안에 낀 거품은 보질 못합니다. 얼마 전, 12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제강점기 시일야방성대곡에 버금가는 시국선언문을 볼 수 있었습니다.(도올 김용옥) 그렇습니다. 우린 지식인에 기대며 살아온 세월이 참으로 깁니다.
 
 
 
 

지식인의 확장된 모습은 무엇일까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용어가 있습니다. '집단지성', 특정 계층(기존 지식인 계층,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는 계층)에 기대지 않고 자발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집단 지성集團知性
집단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하여 쌓은 지적 능력의 결과로 얻어진 지성. 또는 그러한 집단적 능력.

 
 

이제는 집단 지성의 힘을 보편적으로 이야기되는 세상입니다. 집단 지성은 무엇일까요? 교육의 평등화로 전체적인 지성의 수준이 높아져 그간의 지식인이 늘었다는 말인가요? 그럼 사회가 수준 높아졌나요? 그걸 어디서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왜 세상은 자꾸 과거로 회귀하고 세계는 점점 킬링필드로 변해가나요? 끊임없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 뒤엔, 우리에게 아직 지식인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있다 한들, 과연 효용이 있는지도? 오히려 현대의 지식인은 자신들의 존재 차체가 사회적 불평등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이 목표이던 시절엔, 지식인에 대한 인식이 수직적이었고 위험한 모습으로 - 마치 계급 사회의 일부인 것처럼 영향력을 행사하고 삶의 모습조차 격차가 존재하는 고착화의 과정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권력이 되었고 특정한 수준의 위치를 지키려고 해 왔습니다. 그렇게 지식인이 그 최상위에 포함되기 시작하면서 지식인의 역할과 지식인에 대한 기대는 사그라들었습니다. - 실용적인 지식인이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 사회에 대한 '부정'하는 기능은 완전히 사라지고 변할 줄 모르는 죽은 사회가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사회가 생산한 생산물의 일부인 지식인이 종종 화려하게 포장된 괴물로 드러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가히 '집단지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공동의 지향점은 무엇일까요? 개인의 능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것도 집단의 힘이 작용하면 강력해집니다. 기존의 틀을 깨고 정화를 위한 과정은 고통스럽고 시간이 필요하지만, 또 가끔씩 소음이 발생하지만 결국 가는 길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기존의 권력을 가진 이들과 지식인들은 이런 현상을 싫어합니다.
 
 
정신과 이론에 사로잡힌 허위의식의 틀을 깨고 오로지 행위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자유자체일 뿐입니다. 지식인들의 비겁성과 모순, 끊임없는 변명조차 변명할 수 없는 시대를 살며, 지식전문가와 지식인을 구별하느라 안간힘을 씁니다.
 
 


 
무지몽매와 소시민이 가득한 세상을 덮은 '집단 지성'의 힘을 믿어야 할 때입니다. 집단지성은 움직이고 성장합니다. 함께 나아가며 새로운 길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기존의 지식인들은 개인에 한정되었고 때문에 개인사의 변화가 주는 충격에 쉽게 실망했고 또한 쉽게 무기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집단 지성은 거대한 스프링클러가 서서히 넓은 땅을 적셔 나가듯 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개인이 혹여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지라도 옆에서 단단히 잡아줄 수 있습니다. 흔들림 없이 버티고 그 바닥에서 작은 씨앗들을 싹 틔우게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유행일 수도, 또 어쩌면 시류일 수도 있지만 지금의 이런 다중적 인식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지식인의 행동은 결국 구체적인 조건 하에서 구체적인 행동이 되어야 하는 까닭에 집단 지성체로서 우리들은 현재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행동하며 동류로써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새삼스레, 사르트르의 [Plaidoyer pour les intellectuels] 1972년 출판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다시 꺼내 보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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