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정의 아내와 세 아이의 엄마로, 성공한 대학의 언어학 교수로 중년이 된 앨리스(줄리안 무어). 어느 날 문득 멈춰야 하는 순간들이 자주 반복됩니다. 매일의 루틴이지만 조깅을 하던 중 길을 잃어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가족과 한 약속과 이야기를 반복해서 되묻곤 합니다. 요리를 하다가도 과정이 생각나지 않고, 강의 주제가 기억나지 않아 정상적인 수업이 어려워집니다. 일상 일상생활에서도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애를 먹습니다.
나이를 먹고 누구나 노화를 피해가진 못합니다. 안간힘을 쓰더라도 결국 맞이하게 되는 노년. 누구보다 건강하게 나이 들고 싶고 품위를 유지하고 싶지만 유전적인 조발성 알츠하이머라는 선고를 받은 앨리스는 절망합니다.
뇌가 죽어가는 기분이야!!!!
누구보다 똑똑하게 그 어느 누구보다 자발적으로 활기차게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말이 기억나지 않고,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걸 깨달을 때,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의 병증을 느끼는 느낌, 자신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 같고 뇌가 죽어가는 기분, 남편에게 털어놓던 그 순간을 보며 얼마나 무서웠을까 싶습니다. 개인의 인지 능력과 상관없는 알츠하이머, 그것이 더더구나 유전적인 것이라 자신 외에도 자식들에게 까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참담할까요?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자식들이 걱정됩니다.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겠어, 적어도 부끄럽진 않잖아. 암에 걸리면 날 위해 핑크색 리본도 달고 캠페인도 하고 모금 운동도 해 주니까 이런 비참한 기분은 안 들겠지, 뭐랄까? ... 단어가 생각 안 나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앨리스가 앨리스에게 스스로 아무런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자신의 삶을 정리해야 하는지 기록을 남깁니다.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순간의 나중을 위해 영상을 찍는 앨리스의 자구책이 눈물겹습니다.
안녕, 앨리스
나는 너야, 이제부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야, 이제 막다른 길에 온 거겠지
어떤 질문에도 답 못할 지경 말이야. 그럼 이젠 이러는 게 맞아. 확실해
침실에 가면 파란 등이 있는 서랍장이 있어. 맨 위 서랍을 열어. 서랍 뒤쪽에 약병이 있을 거야.
'물과 함께 모두 복용'이라고 쓰여 있어. 약병에 약이 많이 들어 있는데 꼭 한 번에 먹어야 해. 알았지?
그러곤 누워서 자면 돼. 이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마. 질문에 답을 못하게 되면 컴퓨터에 있는 나비 폴더를 찾아.
컬럼비아 대학 건물을 바라보며 앨리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 주고 싶었던 남편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앨리스에게 여기 있고 싶냐고 물어보지만, 아이스크림을 다 못 먹고 가야 한다고 받아들여 실망하는 앨리스의 표정을 발견하고 앨리스에게 괜찮다고 천천히 먹으라고 합니다.
한 밤중에 핸드폰이 없다고 초조해하며 화를 내는 아내를 다독이고 화장실을 못 찾아 실수를 하는 모습을 보고도 자신이 항상 옆에 있을 거라 말하는 남편 존(알렉 볼드윈), 앨리스에겐 가장 든든한 힘이 됩니다. 병이 점점 빠르게 진행 중이지만, 삶의 마지막까지도 앨리스다운 모습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가족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담담하게 그려집니다.
네 엄마가 어떻게 기억되는지도 중요해
가족들이 각자의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앨리스를 돌봐야 할지 서로 고민하는 과정이 무척 현실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병증상의 변화 과정에 대응하는 앨리스도 감정적이지 않고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애쓰는 모습을 세심하게 표현하고 있어 더욱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힘든 일이지만
네 엄마가 어떻게 기억되는지도 중요해
네 엄마는 짐이 되길 원치 않을 거야
애나는 아이도 낳았고 일도 해야 하고
톰, 너도 엄마를 돌볼 상황이 아니야
난 메이오 클리닉을 더는 미룰 수 없어
이번 달 초에 갔어야 했는데 내가 데리고 갈게
최상의 치료를 받게 할 거고 미네소타에 도착하면 엄마도 좋아할 거야
그럼 우리도 다 좋아지겠지
살면서 나이를 먹었다고 느낀 순간은 일시적인 건망증과 함께 어떤 자극에 물리적인 혹은 정서적인 반응이 느려진 것을 눈치챘을 때였습니다. 순발력과 유연성이 떨어진 걸 느끼는 순간입니다. 그동안 살아온 '나 자신의 모습이 사라진' 채 남은 '또 다른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내 모습의 흔적들'과 함께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하게 합니다.
알츠하이머 협회에서 앨리스가 실수하지 않기 위해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가며 연설하던 장면은, 여러모로 많은 생각의 고리들을 던져주는 장면으로 인용합니다.
제가 평생 쌓아온 기억과 제가 열심히 노력해 얻은 것들이 이제 모두 사라져 갑니다.
지옥 같은 고통입니다.
점점 더 심해지죠.
한때 우리의 모습에서 멀어진 우린 우스꽝스럽습니다.
우리의 이상한 행동과 더듬거리는 말투는 우리에 대한 타인의 인식을 바꾸고
스스로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바꿉니다.
우린 바보처럼 무능해지고 우스워집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병이죠.
......
지금 전 살아 있습니다. 전 살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기억을 못 하는 저 자신을 질책하곤 하지만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순간도 있습니다.
제가 고통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서죠.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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