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인간이기에 비록 지금 당장은 힘이 들어도 나중에는 좀 더 나은 인생이길 바라며 희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과정에서야 나락도 떨어지고 오랫동안 멈춰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아무도 장담할 수 없고 아무도 계획 그대로를 살아내지는 못하지만 또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의 현실에 놓일 수 있는 것 또한 인생의 다른 한 면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했더라도 말이죠.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꾸리고 살다가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혼자 남은 노년의 삶, 자신의 몸마저 병들어 일할 수 없을 때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자신이 이루어온 것이 마치 풍경처럼 고요해지고 멀리 바라봐야 할 때가 옵니다. 삶이 마른 풀잎처럼 바스락 거리며 활기를 잃어갈 때 한 번쯤 세상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늙고 병든 몸과 생각은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당장의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때가 되면, 누구나 삶은 절박해집니다.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세상
평생을 해 온 목수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면서 다니엘(데이브 존스)은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갑니다. 관공서의 절차는 복잡하고 요구사항은 까다롭습니다. 심장병이 악화되고 있었지만 일할 수 있는 상태라는 판단을 받아 요양 급여도 신청할 수 없습니다. 모든 절차는 알 수 없게 복잡하고 관료적입니다. 인터넷 접근성도 떨어지지만 배우기엔 시간이 모자랍니다. 방침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직접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스스로 알아서 하기엔 벽이 높아 좌절합니다. 노인이 사회제도에 접근하기 어려운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우연히 만난 싱글맘과 두 아이를 돕게 된 다니엘은 오랜만에 잠시 예전의 일상처럼 지냅니다.
생로병사의 길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제도적 장치 - 자신들의 알 수 없는 먼 미래를 위해 마련해 놓은 제도들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그 제도를 이용하지 못해서 구조적으로 인생의 나락에 떨어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노인이 제도에 접근하기 어려운 현실적 이유 - 인터넷 사용 능력 부족과 선의(?)의 제도가 가진 한계성, 기계적 접근은 사람을 살릴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있습니다. 모든 행정적 절차마다 자신의 처절함과 가난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수치심이야 어찌 되었든, 고용보험 수급과 장애, 질병 수급에 관한 기준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됩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자신이 성실하게 살아온 세상을 향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지만 묵살당하고 좌절하면서도 어려운 형편의 이웃과 마음을 나누는 따뜻한 다니엘의 모습은 너. 무. 도. 인간적입니다. 굽실대지 않고 떳떳하게 살았고, 도둑질도, 구걸도, 나쁜 짓조차 하지 않았던 그는 단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찾고 싶었지만 - 탁상 행정의 관료주의적 행태들은 그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며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밟아 버립니다. 대접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이 대상으로써 길에 팽개쳐질 때 취급되는 기분이란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폭력 앞에 놓인 삶이 됩니다.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켜내는 것은 또 왜 이렇게 힘이 들까! 소통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답답한 외침 속에 얼마나 많은 다니엘들이 옆에서 몸무림 치고 있을까? 효율성과 합리가 세상의 최우선이 되는 곳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더더욱 인간적인 것을 그리워하고 목말라한다는 걸, 사람들의 관심과 모두가 함께 이겨내는 노력들이 세상의 허울을 어떻게 깰 수 있는지 담담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차라리 선악의 구도였으면 마음이 편했을까요? 누구 하나 총질하지 않고 누구 하나 피 흘리지 않지만 서서히 목조여 오는 냉혹한 현실이 서늘하게 소름 끼칩니다. 그 가운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현실에서도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인간적인 다니엘이 있어 위안이 됩니다. 관료주의 행정에서 얼마나 많은 성실함들이 망가지고 거리로 내몰렸을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삶이 비록 비루하고 앙상하지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 옆에 있는 인간일지 모릅니다. 비록 세상에서 잊히고 지워질 이름일지라도 다니엘이 고용공단 벽에 적은 문구는 통쾌한 비애를 느끼게 합니다.
I Daniel Blake. Demand my appeal date before I starve and Change the shite music on the phone.
2025.07.16-추락의 해부 Anatomy of a Fall 2024
추락의 해부 Anatomy of a Fall 2024
오랜만에 섬세한 영화를 봤습니다. 프랑스 특유의 (조금은 피곤한) 논리들을 볼 수 있었고 오랜만에 영화 음악에 귀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문득, 우리가 생을 견디는 힘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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