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품의 감정을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세상살이를 하는 모든 이들은 모조품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거짓의 순간을 산다 해도 그조차 진품이길 바랍니다. 설령 자신의 인생이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어.’ 이 한마디로 스스로 합리화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류를 회피하려는 본능이 인간에게는 숨어있습니다. 세기의 경매사이자 예술품의 가치를 완벽하게 알아보는 감정인 버질 올드먼(제프리 러쉬) 은 미술품을 최고가로 낙찰시키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느 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낯선 여인이 고 저택의 물품 감정을 의뢰합니다. 버질은 직업적인 호기심으로 감정 의뢰를 수락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낯선 여인과의 만남은 예상치 못한 인생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기면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지
여자의 초상화를 방안에 잔뜩 모아두고 세상과는 거리를 유지하며 살던 버질 올드만, 방 안에서 초상화를 바라보는 버질의 표정은 조금 기괴하고 굉장히 폐쇄적입니다. 자신을 위해 진품을 가득 모아둔 유명한 경매사, 자신의 자존심 때문일지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 때문일지 알 수 없는 그 표정은 결국 세상과의 '단절' 그 이상의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냉정하고 예민하게 살아온 한 남자에게, 세상을 향해 자신의 닫혔던 마음을 열게 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낯설고 두렵지만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낯선 여자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집중이 사랑으로 나아가고 사랑이 힘을 받아 스스로 자신의 태도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의심 많고 무미건조한 인생에 새로운 활력과 기회를 얻은 버질이 그동안 몰랐던 또 다른 인생의 이면을 발견한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을지 모릅니다. 세상과의 접촉을 꺼리던 장갑 속의 버질이 작품이 아닌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인생에서 느끼는 진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은 마치 어린 소년의 모습처럼 순수하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말처럼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기고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합니다.
뭐든 만들고 고쳐서 살려내는 천재 기계공 로버트(짐 스터게스)가 뭔지 알 수 없던 구조물의 조각들을 맞춰 보캉송의 말하는 로봇을 구현해 낸 것은 참 흥미로웠는데요, 인간의 상상력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속임수 또한 상상 이상이라 놀라웠습니다. 모든 창작이 결국 약간의 거짓과 모방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감정은 예술과 같아. 위조할 수 있지
경매를 의뢰한 낯선 여자에 대한 직업적 호기심에서 시작되었지만, 클레어 이벳슨(실비아 획스)이 용기를 내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남자는 사랑의 힘을 얻어 생애 처음으로 여자를 사랑하고 마음을 엽니다. 자신의 방에서 여자들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혼자 지내던 자신처럼 커다란 저택에서 은둔한 채 살아가는 여자의 인생을 마주하며 클레어를 향한 안타까움이 더 컸을지 모릅니다. 불안하고 슬픈 이야기를 간직한 한 여자에 대한 버질의 진심은 자신의 인생을 걸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NIGHT&DAY에 앉은 버질의 모습은 비현실적입니다. 각각의 시침과 분침이 달리 가리키는 시간들, 그 속에서 각자 먹고 마시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버질은 주문을 하지 않은 채 " 아니, 기다리는 사람 있어요." 라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을 사랑한다던 클레어를 마지막까지 기다립니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혹시 허상을, 신기루만 쫓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제프리 러쉬의 출연작이라는 생각만으로 봤다가 얼얼하게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기분입니다. 버질은 자신이 가꿔온 인생(진품이라고 생각해 온)이 가짜에 의해 무너진 것이 허망했을지, 아니면 가짜로 드러난 자신의 사랑이 그래도 진품의 의미를 깊이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믿고 싶었을지는 글쎄요... 어느 누가 자신의 인생이 Best Offer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저 Best Offer를 향해 가는 것이겠지요.
" 가품도 진품의 진미는 하나씩 갖고 있지. 아무리 가품이어도 자신을 나타내고 싶은 걸 이기지 못하고 붓터치 같은 걸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말거든. 본래 의도와 다르게 말이야."
마지막,
사랑이란 아름다운 이름 뒤에 감춰진 잔인함을 바라보며, 버질도 영화를 보는 이들도 동일한 잔인함 앞에 무기력해지는 순간을 맞습니다. 때문에 더더욱 클레어의 사랑이 진실이었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화려한 영상을 바라보며 어지러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버질의 무표정한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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