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카톡으로 날아드는 생생한 현장 중계 문구들, "아, 할머니 무단 횡단하셔,...", "아니 왜 신호를 안 지키시지??"... 손주가 우연히 본 할머니의 무단 횡단은 꽤나 충격적이었나 봅니다. 버스 창 너머로 기운 없이 걸어가던 한 노인이 횡단보도를 향해 갑자기 돌진하는 장면을 본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할머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노인들이 횡단보도만 보면 날쌔게 돌변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 때문일까 궁금합니다.
어디서 그렇게 갑자기 힘이 불끈 솟는 걸까요?
할머니가 날아다니신다
같이 길을 가다가도, 나름 보폭을 맞추느라 애쓰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에 맞춰 나도 걸음을 늦추고 있지만 어느 순간... 옆에 사람이 아. 무. 도. 없습니다. 엄마는 이미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얼른 오라며 손짓을 합니다. 대체 그 기운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요?
조금 생각해보면, 내 부모님이 살던 시대는 한국사의 모든 불행한 구간을 촘촘히 지나온 시간들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끝머리에 태어나서 유년기를 전쟁으로 보냈습니다. 산골이지만 피난 행렬을 경험했고 죽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홀어머니가 키우는 형제들 속에서 자랐습니다. 당연히 학교는 꿈도 못 꾸는 사람이 더 많았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마을에 어쩌다 한 둘에 불과했습니다. 물도 물차가 오는 날에 맞추어 배급을 받아서 먹어야 했고 형제들 속에서 자라며 나름의 생존법을 익힙니다. 집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재빠른 눈치코치가 생존을 좌우했으리라 짐작은 됩니다. 단지, 그 생존을 위한 눈치코치가 그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조금 편한 생활을 해도 되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은 슬픈 일입니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탓이리라 짐작할 뿐입니다.
'줄을 섭시다.‘ 한 때, 이런 말을 학교나 길에 적어두고 줄 서기 캠페인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문구가 없어도 어딜 가나 필요하면 암묵적으로 자연스레 줄을 서곤 하지만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선진국에서 줄 서기가 당연하다고 교육과 홍보를 통해서 그나마 현재 정착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가 중학교 때만 해도 엄마랑 가는 곳에는 항상 어른들의 ‘새치기'가 일상이었습니다. 버스를 타러 가서도,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가서도 천연덕스럽게 습관적으로 새치기를 했었습니다. 그런 엄마가 부끄러워 외면하고도 싶었지만 의기양양하게 보란 듯이 먼저 버스를 타고, 당연하단 듯이 원하는 물건을 손에 쥐고 마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것은 빠르게 낚아채야 한다는 건가? 도무지 그런 행동에 부끄러움이 생기지 않는 건가? 사춘기 전후 매번 갈등에 빠지곤 했던 질문들이었습니다.
이젠 천천히 가도 돼요
도대체가 빨리빨리에만 익숙한 한국인의 기질상 줄을 서거나 느긋하게 기다리거나 하는 행위들은 아예 불가능한 것인가? 교육을 통해 줄 서기가 어느 정도 생활화된 후에도, 일부 노인들은 주위의 싫은 눈총을 받으면서도 습관을 드러내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특히 왜 그렇게 식당이나 택시, 버스를 탈 때면 특유의 습관이 튀어나오는 것인지,... 지금이야 그래도 그렇게 불필요한 반칙(?)을 할 이유가 없어서일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해해서 그런 것인지 차츰 질서에 맞추어 지냅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다 가끔씩 등장하는 무단횡단을 보거나 들을 때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이젠 저도 요령이 생겨서 엄마와 함께 가는 길에서는 횡단보도를 먼저 발견하고 슬며시 힘(?)으로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답답하다고 손사래를 치더라도 길을 건너고 놓아줍니다. 급한 세월을 주변 둘러볼 틈 없이 살아온 탓이겠지만, 도무지 천천히 가질 못하는 부모님들을 이제는 가끔씩 자식들이 손도 잡고 팔짱도 끼고, 그렇게 천천히 같이 가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어쩌겠습니까? 나이 먹고 살아온 습관을 송두리째 바꾸지 못하는 건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나쁜 습관 하나씩들은 갖고 사는 거지만, 그래도 가급적 위함한 상황은 없었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저도 나이를 더 먹고, 후대의 아이들이 이해 못 할 저만의 나쁜 습관을 발견하지 않으리라 자신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세대마다 독특한 특징들을 하나씩은 갖고 산다고 생각하면 부모 세대를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위험해서 참으로 밉지만 그냥 그런 거라 생각해 봅니다.
2022.10.18 - [짧은 생각] 디지털 세상에 갇힌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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